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 대포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external/www.militaryfactory.com/paris-gun-artillery-wagon.jpg]] 1차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이 만든 [[열차포]]. 당시 [[파리(프랑스)|파리]]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한 무기였다. 1918년 3월 23일 토요일 7시 20분 파리의 센 강변 한 가운데에 거대한 포탄이 떨어졌다. 처음 포격 소리를 들은 [[프랑스 육군]] [[장병]]들은 [[독일 제국군]] [[육군]] [[포병]]의 77㎜ 구경 야포탄이라 생각했고 시민들은 독일 [[육군 항공대]]의 23파운드 항공폭탄이라 여겼다. 조사 결과 파편 조각을 통해서 그것이 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포탄이 어디서 발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대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독일 육군의 항공기가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며칠 전에 수류탄 공장에서 오폭사건이 있었기에 그 영향으로 봤다는 기록이 있다. 포격 초반 프랑스 육군 항공 장교들이 대공 경계 근무자들을 급히 호출하여 조사한 결과 비행기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하여튼 포격을 개시한 23일 당일의 물리적인 전과는 25발의 포탄과 16명의 사망자 21명의 부상자와 7개의 가옥 그리고 파리 시내를 7시간동안 마비시키는 의외로 낮은 피해를 입혔지만 원래부터 독일이 노리던 상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의미는 충분히 달성하였다.[* 이는 실패 병기라고 여겨지는 [[독일 제국 해군]] [[해군 항공대|항공대]]의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체펠린]] [[비행선]]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쟁 말기 체펠린 비행선은 연합국 전투기에게 마구 격추당하며 호구취급 당했지만 파리 대포는 끝까지 연합군을 괴롭했다는 데에 있다.] 공포에 빠진 파리 시민들은 의외로 빠르게도 다음날 4시쯤 군의 발표에서 그 포탄이 독일에서 개발한 신형 대포의 포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월이 지나 4월이 되자 프랑스 육군의 레인저들도 이 파리 대포의 위치를 어느정도 추정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주도면밀하게 파리 대포 주변에 적당한 다른 대포들도 같이 설치하여 그저 그런 방열 대형으로 보이게 하거나 위장포를 씌워 공중 정찰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열차포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계속해서 이동시켰기 때문에 포격이 계속되던 8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은 파리 대포를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실제로 파리 대포를 발견하여 공격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파리 대포가 곧바로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3월부터 8월까지 무려 320~367발(기록마다 차이가 있다)의 포탄이 날아와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망 250여 명, 부상 62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중에는 금요일 랭스의 랭스 노트르담 성당에 인파가 모였을 때 포탄이 성당 기둥에 [[http://mentalfloss.com/article/58990/wwi-centennial-reims-cathedral-burns|직격]]하여 무려 88명을 일격에 사살한 기록도 남아있다.[* 랭스 노트르담 성당은 흔히 랭스 대성당이라 불리며,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곳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 곳이다.]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무려 1만이 넘는 인구가 빠져나갔고 같은 시기 파리 남부의 [[오를레앙]]은 인구가 두배로 늘었다. 파리 시민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차나 마차를 거부하고 철도와 버스를 고집했다고 한다. 또한 파리 대포의 공격이 시작된 3월 말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대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의 장례식도 대폭 축소된 채 거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